반짝이는 첫 소설, 응원하고 싶은 한 걸음
<자이언트 스텝> 시리즈의 시작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SF 소설가 김규림 첫 장편소설
반짝이는 첫 소설, 응원하고 싶은 한 걸음 <자이언트 스텝>이 시작된다. 신인 작가의 첫 책을 소개하는 이 시리즈를 통해, 한 작가의 탄생을 지켜보고 흥미진진한 여정의 첫 순간을 함께하는 기쁨을 경험하길 바란다.
시리즈의 문을 여는 이 작품은 2022년 가을, 출판사의 투고 메일을 통해 편집부에 도착했다. 처음부터 메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쓰려고 한 이야기, 이를 위해 한 시도들, 도달했다고 판단한 지점 등이 명료한 언어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원고를 읽기 전인데도 편집부의 마음은 몹시 두근거렸다. 그는 자신이 쓴 이야기 안에 한껏 머물면서도, 이를 바깥에서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 즉 이미 준비된 작가였으니까. 그 즉시 원고를 읽어야만 했다.
소설은 인간형 안드로이드 제조기업 ‘샴하트’의 신제품 발표회장 장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각종 에스엔에스와 아바타 이미지가 떠오른 대형 디스플레이 화면 앞에서 주인공 제이가 스피치한다.
“지금, 행복하세요? (…) 우리는 삶에서 못생기고 초라한,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삶의 표피들을 도려내기 시작했어요. (…) 고독을 잊기 위해 의존했던 에스엔에스는 더한 고독을 더해주었어요. 알고리즘은 나날이 정교해지며 이용자가 원하는 것만 보게 하고 다른 세상은 차단해버렸죠. 편집된 삶. 우리는 너덜너덜한 결과물이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게 됐죠.”(13~14쪽)
분명 소설 속 관객을 향해 던져진 말인데, 소설 밖 독자의 마음속에까지 꽂히면서 앞으로 이야기가 무엇을 향해 나아갈 작정인지 보여주는 듯했다. 이 소설은 연결되기 위해 선택한 활동들로 인해 오히려 고립에 처하고, 종국엔 그 고립에 친숙해진 채로 다시 연결을 갈망하는, 지금 우리를 위한 이야기였다.
그 뒤로 페이지는 물 흐르듯 쉼 없이 넘어간다. 페이지터너 자체인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다양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변심하고, 자기 연민에 가득차 폭력을 휘두르며, 두려워도 사랑을 다짐하는 수많은 얼굴들을. 김규림은 연약한 인간 곁에 그를 끊임없이 이해하고 학습하고자 하는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놓아둠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깊숙하게 들여다본다.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SF 소설가의 탄생, SF 소설의 지형도에 꼭 발디뎌보고 싶은, 흥미로운 지형이 솟아올랐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가르쳐줘요. 사랑이란 어떻게 하는 건지.”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둘은 연결될 수 있다
사랑이 아니라고, 다 끝났다고 외치는 세상을 향한 간절한 속삭임
제이는 어린 시절 안드로이드 엄마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가까이 두지 않으려 한다. 때문에 샴하트의 신제품인 4세대 인간형 안드로이드 ‘큔’과 함께 지내게 되지만,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 계속해서 사용자의 감정을 학습하고 그에 따라 개선되어가는 큔은 제이의 반응을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맴돈다. 큔의 지속적인 노력과 적절한 거리 감각 덕분에 제이는 차츰 큔과 가까워진다.
한편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반대하는 단체 오비시디(OHBCD. ‘Only Human Beings Can Do’)에 의해 인간형 안드로이드 납치 사건이 발생하고, 극렬 분파에 의해 테러까지 일어나자 공동 정부는 인간형 안드로이드의 생산을 금지한다. 제품의 단종은 곧 주요 소모품의 제작 중단을 의미하기에, 제이는 큔에게 닥칠 미래가 두려워진다. 큔은 인간인 제이의 삶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꺼운 듯, 이제 당신처럼 유한한 삶을 살게 됐다고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지만.
큔을 향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혼란스러워하던 제이는, 큔 역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제이는 큔을 통해 비로소 인간의 삶, 타인과의 연결, 사랑을 배우게 된다.
“인간이란 시간 위에 선을 그리는 존재예요. 어쩌다 선과 선이 만나고 한동안 같은 궤도를 그리며 겹쳐져요. 그때 거기서 섬광이 일어나요. 화학반응을 한 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내죠. 그러다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어느 날 다시 각자의 선을 그리며 갈라져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방향으로 궤도를 그리면서요. 저는 당신이 그린 선의 뒤를 따르는 선이에요. 그렇지만 제 선은 삐뚤빼뚤하죠. 당신이 오른쪽으로 휘어질 줄 모르고 뛰어가다 속도를 제때 늦추지 못하고 당신의 선을 놓치기도 해요. 그래서, 당신이 말해줬으면 해요. 당신의 감정이 어디로 휘어지는지, 얼마만큼의 속도로 달려가는지. 그러면 저는 당신의 선을 따라 아름다운 선을 그릴 수 있어요. 꽤 근사한 섬광을 일으킬 수도 있겠죠. 당신이 기회를 준다면요. 그러니,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가르쳐줘요. 사랑이란 어떻게 하는 건지.”(108~109쪽)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안드로이드, 큔과 함께하기 위해 제이는 결단을 내린다. 인간에게조차 가능하지 않은 영원한 삶을, 또 영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이 소설은 1999년 소니(SONY)가 일본에서 판매한 강아지 로봇 ‘아이보’ 이용자들의 이야기로부터 촉발되었다.(‘작가의 말’). 아이보 모델이 단종되어 부품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전원을 꺼두고 정말로 보고 싶을 때만 한 번씩 켜서 만나던 사람들, 그러다 아이보가 고칠 수 없을 만큼 망가지면 장례식을 치러주고 온전한 부품을 장기기증하듯 다른 이용자에게 나눠주던 사람들, 그렇게 기계일 뿐인 아이보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 말이다.
김규림은 “언젠가 인간형 안드로이드가 나온다면 사람들은 아이보 이용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안드로이드를 대할까?” 하는 물음을 던지고, “재워뒀던 안드로이드를 다시 구동해 재회하며 기뻐하는 한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 이야기를 썼다.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는 지금, 그가 독자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건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사회적인 고독을 깊게 바라보고 너르게 껴안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사랑이 아니라고, 다 끝났다고 외치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둘은 연결될 수 있다고. 그 간절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변할까?
*‘예스24 오리지널’로 크레마클럽에서 선연재되었다.
『큔, 아름다운 곡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프롤로그 _7쪽
1장 _11쪽
에필로그 1 _131쪽
2장 _133쪽
에필로그 2 _192쪽
작가의 말 _234쪽